구체적인 줄거리보다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고 느낀 주관적인 감정을 정리합니다. 개인적으로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중에도 계속 앉아서 정훈희와 송창식이 듀엣을 부르는 '안개'를 멍하니 들으며 가시지 않는 여운에 자리를 뜨기 힘들었습니다.
오랜만에 찾은 극장
다양한 장르와 다양한 나라의 영화를 좋아했던 (자칭) 잡식성 영화광이 세월이 흘러 극장을 찾는 횟수는 줄고, 취향도 흐려졌으며, 섬세했던 감정은 무뎌져 그냥 한 번 보고 잊을 수 있는 타임 킬링용 영화만 간간히 보며 살던 중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러 극장을 찾은 이유는 비단 박찬욱 감독이 2022년 칸느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아서 만은 아니었습니다.
이젠 거장의 반열에 오른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극장에서 본 영화가 <사이보그지만 괜찮아>가 유일했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꼭 극장에서 보리라 결심했습니다. 결론만 말씀드리면 '결심하기 정말 잘했다'입니다. 여러 번 관람한다는 의미의 N차 관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화 <헤어질 결심>도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영화 리스트에 올린 분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랜만에 극장을 찾은 만큼, 오전에는 <헤어질 결심>을 식사 후 오후에는 <탑건 매버릭>을 예매했습니다. 어쩌면 굉장히 상반되는 느낌의 영화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둘 다 제 취향에 맞을 것이라 생각했고 결국 두 영화로 행복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지난 탑건 매버릭 포스팅은 이 링크에서 확인하시고, 영화 할인정보를 정리한 내용은 이 링크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믿고 보는 박찬욱 감독 / 정서경 작가 / 류성희 미술감독
박찬욱 감독, 봉준호 감독과 동시대에 살며 데뷔부터 거장이 되는 과정을 보며 그들의 영화를 생생하게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축복처럼 느껴집니다.
<공동경비구역 JSA>로 국내에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해서 <올드보이>가 2004년 칸느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으며 세계적으로도 명성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이라 불리는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그리고 마지막 <친절한 금자씨>에서 비로소 정서경 작가와 영화 작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중에 <친절한 금자씨>와 <박쥐>, 그리고 <아가씨>를 굉장히 인상 깊게 봤고 좋아했는데 이 작품들 모두 정서경 작가, 류성희 미술감독과 함께 했습니다. 제게 있어서는 드림팀이라 그 들의 작품을 안 볼 수가 없습니다.
다소 이상할 수 있는 소재, 인간의 폭력성, 섬세한 연출과 시각화된 아름다운 미술, 영화 속 장면과 함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음악, 괜히 거장의 반열에 오른 것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박찬욱 감독은 본인은 "대중을 위한 상업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대중과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예술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국한되는 것이 걱정된다라는 의사를 표현했습니다.
이번 작품 <헤어질 결심>은 서사도 쉽게 이해되고 친절합니다. 장르 또한 로맨스, 멜로입니다. 상직적이고 어려운 표현이 가득한 난해한 영화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화면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와 대사 속에 담긴 의미를 모두 곱씹어 볼 만큼 예술적으로 연출한 상업영화입니다. 자! 이 정도면 <헤어질 결심>을 볼 결심이 서시는 지요?
▶ 세련되고 섬세한 아름다움
영화를 보기 전 줄거리에 대한 사전 정보는 전혀 없었습니다. 추락사한 어떤 남자의 젊은 중국인 아내가 탕웨이,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 박해일. 이 정도의 정보에 코미디언 김신영이 나온다는 것이 전부. 도대체 '헤어질 결심'은 누구의 결심일까? 궁금한 마음을 가진 채 영화를 봤습니다.
러닝타임이 138분이니 영화가 긴 편입니다. 챕터가 나뉘어 있진 않지만 약간의 시간을 두고 전, 후 두 부분으로 나뉜 영화입니다. 로맨스, 멜로물이라는 것이 뻔하게 만들면 뻔할 수밖에 없을 텐데 <헤어질 결심>은 다릅니다. 영화 끝까지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연출력도 훌륭합니다.
문어체 적인 대사가 몰입을 방해할 수 있음에도 세련된 연출로 무마시키며 오히려 더 독특한 재미를 만들어냅니다. 또한 구체적인 사건과 설명이 생략된 채, 배우의 행동과 연출, 미술, 음악 등에서 그들의 심리를 읽을 수 있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영화 <고래사냥>에 왜 '고래'가 나오지 않냐고 이해하지 못하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면 영화 속 세련된 연출을 보는 재미를 느끼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 진한 여운
영화 후반에 갈수록 기억에 남는 대사와 장면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전반부에서 쌓아 올린 감정선이 있어서겠지만, 그 애틋함이 영화가 끝나도 쉽게 일어서지 못하게 하는 이유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세 가지 이유가 애틋한 감정을 일으켰습니다.
- 사랑이 끝나가는 사람과 시작하는 사람의 묘하게 어긋난 타이밍에 대한 탕웨이의 대사가 잊히지 않습니다.
- '사랑한다'라는 말은 아니지만 '사랑한다'로 해석할 수 있는 상대의 말을 '사랑한다'로 기억하며 간직하고 살았던 마음이 애틋했습니다.
- 영화와 어우러지는 노래 '안개'가 영화가 끝나도 쉽게 극장을 나서지 못하게 합니다.
박찬욱 감독이 무대인사에서 정훈희 가수의 노래 '안개'를 알게 된 것 하나만으로도 영화에서 건진 게 있지 않느냐는 뉘앙스의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노래의 노랫말과 영화는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영화 후반에 느꼈던 애틋하고 아련한 느낌이 굉장히 여성적인 감성인데 남성 감독이 이렇게 세심한 터치로 영화를 만들 수 있나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기존 작품들처럼 핏빛 낭자하거나 야하며 폭력적인 장면이 빠졌음에도 정말 다른 방식으로 세련되게 잘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헤어질 결심>을 보는 재미의 한 축이었습니다.
▶ 사소한 궁금증
과연 외국에 이 영화가 번역될 때, 한글에서 오는 말의 재미를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 사소한 궁금증이 세 군데에서 생겼습니다. 두 개는 검색을 통해 찾았는데 나머지 하나는 어떻게 번역했는지 아직 못 찾았습니다.
- 외국어를 말할 때 어쩔 수 없이 어색한 문어체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습니다. 영화에서 탕웨이는 '마침내'라는 말을 종종 합니다. '마침내'라고 하면 영어로 'Finally' 바로 연상되지만 구어체로 많이 쓰이기 때문에 적절치 않습니다. 'At last'로 번역되었다는 말을 듣고 역시 번역도 세심하게 잘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그렇다면 '원전 완전 안전'은 어떻게 이 운을 맞출 수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역시 달시 파켓은 훌륭했습니다. 'Clearly Cleaner Nuclear'로 번역했다고 합니다. 최선의 선택 아닐까 싶습니다.
- '학문을 좋아해서 애널리스트는 아니고'라는 썰렁한 유머를 던진 대사가 나오는데 '학문'을 발음대로 하면 '항문'이 되는 우리나라 말을 어떻게 영어로 번역하고 똑같진 않더라도 이 뉘앙스를 전했을까 너무 궁금한데 아직 답을 못 찾았습니다.
오랜만에 좋은 영화를 보니 다시 무뎌졌던 세포들이 살아나는 느낌입니다. <헤어질 결심>을 보러 극장으로 향하시길 추천합니다. 박찬욱 감독 무대인사처럼 영화 마지막 흐르는 노래를 듣게 되는 것만으로도 건질 것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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